![박 요한(보정).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4d3622_499f1aeb059046f8b6c22f205e906da6~mv2.png/v1/fill/w_160,h_220,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EB%B0%95%E3%80%80%EC%9A%94%ED%95%9C%EF%BC%88%EB%B3%B4%EC%A0%95%EF%BC%89.png)
박요한
길림성 길림시에서 시작된 나의 첫 북한 사역은 제남으로 옮겨 왔다. 그 과정에 고된 사역의 학습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몇 명의 형제들이 떠나갔다. 나는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연길에 있는 조선족 전도사님에게 북한 형제들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족 전도사님은 박요한 선생을 보내 주었다.
요한 선생은 먼저 와 있는 허익두 선생의 고향 친구였다. 요한 선생은 1998년 익두 선생과 동생 다윗 형제와 함께 중국으로 탈북했다. 요한 선생은 태어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딸을 두고 탈북했다. 요한 선생은 눈이 무섭게 크고 입술도 두터웠다. 목소리도 걸걸했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처음에는 연변의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다 연길시 의란진에 있는 돌가루 공장에서 일을 했다. 돌을 가루 내서 유리 원료로 만드는 공정은 열악하고 힘겨웠다. 중국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라 공장 주인은 갈 곳 없어 방황하는 탈북자들을 받아서 일을 시켰다. 월급은 주지 않았다. 하루 12시간씩 힘들게 바위를 부수어 가루를 내는 일을 해도 돈을 벌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탈북자들이 그 공장에서 일을 했다. 다들 갈 곳이 없었고 그렇게라도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모여 그렇게 고되고 힘들게 살았지만 북한 보위부는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한 곳에 수십 명의 탈북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북한 보위부는 이들을 한꺼번에 잡기 위해 중국 공안들과 함께 버스를 몰고 체포하러 왔다. 다행히 돈도 주지 않고 부려먹던 중국인 사장이 탈북자들에게 미리 정보를 주어 도망가게 해 주었다.
요한 선생은 돌가루 공장에서 도망가면서 동생 다윗 형제와 헤어졌다. 다윗 형제는 생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연길 조직폭력단에 들어갔다. 요한 선생은 조선족 전도사님으로부터 성경을 배우는 사역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를 찾아 왔다. 물론 성경을 배우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생계 문제 해결이 목적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배고프게 살아서인지 다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했지만 요한 선생은 유별나게 덩치가 크고 힘도 셌다. 늘 사납게 싸우는 살벌한 탈북자들의 세계에서 살다가 온 사람이라 사역장에 온 다음 날부터 자기는 몇 년 동안 중국에서 무술을 배웠다고 큰소리 치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역장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강자로 군림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요한 선생이 사역장에서 해야 할 일은 싸워서 이기고 강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고 원래 사용하던 공격적이고 거친 북한식 말투도 확 바꾸고 어색한 한국식 경어를 사용해야 했다. 사역장은 싸우고 경쟁하고 그래서 높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면서 섬기고 낮아지는 곳이었다. 거기에다 난생 처음 보는 성경을 하루 종일 녹음기로 들으면서 통독해야 했다. 기도라는 말도 처음 듣는 사람이 하루에 2시간 이상씩 기도해야 했다. 외출도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돌가루 공장에서 바위를 부수고 주먹으로 공격하고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인줄 알았고 그런 험한 방식의 삶에 자신감이 충만했던 요한 선생에게는 정말 힘든 세계였다. 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그는 강자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약자일 뿐이었다.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는 것부터 고문이었다. 요한 선생은 처음 들어올 때에 한글도 미처 숙련되게 읽지 못했다. 일생 동안 글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가끔씩 소리 내서 읽을 때 자기 차례가 오면 진땀을 빼며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허세를 부리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자신감에 충만했던 요한 선생이었지만 3일이 지나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매일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고 다녔다. 그러나 사역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에게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고단한 훈련을 견디어 내고 탈북자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의 귀한 사역자들이 될 수가 있었다.
요한 선생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벽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댔다. 허익두 선생과 김권능 선생이 요한 선생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야! 너는 우리가 두 달씩이나 기도해서 들어온 놈이야. 잘해야 돼!"
진칼빈 선생과 민선주 선생은 뒤늦게 사역장에 들어온 요한 선생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한글도 가르쳐 주고 성경도 가르쳐 주었다. 요한 선생도 주님의 은혜를 받기 시작했다. 요한 선생은 빠른 속도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요한 선생이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너희들은 머리가 좋지만 나는 머리가 나쁘다! 그래도 너희들이 한 번 할 때 나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한다. 그러면 나도 된다!"
요한 선생은 말한 대로 정말 그렇게 했다. 밤마다 새벽 1, 2시까지 말씀을 암송하고 별도 학습을 했다.
![박 요한 선 생(2a).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4d3622_d86ba6d316e14696945fed7fb36fb764~mv2.png/v1/fill/w_750,h_500,al_c,q_90,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EB%B0%95%E3%80%80%EC%9A%94%ED%95%9C%E3%80%80%EC%84%A0%E3%80%80%EC%83%9D%EF%BC%88%EF%BC%92%EF%BD%81%EF%BC%89.png)
이 사진은 대학교 운동장으로 운동하러 가기 위해 봉고차를 타고 가면서 누군가가 찍은 사진이다. 북한 선생에게 카메라를 맡겼더니 시도 때도 없이 별걸 다 찍어 댔다. 장난삼아 찍은 사진이었지만 훗날 나에게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제일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박요한 선생이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성경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 운동장에 가서도 짬짬이 암송을 하고 성경을 읽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요한 선생은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노력하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설교하고 기도하는 능력,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웠다. 정주 사역장에서 북한 선생들이 설교 훈련과 리더십 훈련 과정까지 마치고 나서 이들을 정식 북한 선교사로 임명했다. 요한 선생도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그가 보인 열정과 성실함으로 인해 앞으로도 더 잘할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이 때문에 요한 선생도 다른 선생들과 함께 북한 선교사로 임명했다.
요한 선생은 설교할 때면 베드로 사도를 보는 것 같았다. 열정적이었고 단순한 내용을 가지고도 부흥사처럼 호기 있게 설교했다. 듣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선생으로 세워지고 나서 주먹을 꽉 틀어쥐고 흔들면서 나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저는 꼭 목사가 되어서 북조선의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겠슴다. 지켜봐 주십시오."
북한 탈북자들이 북한 선교사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소림사로 여행을 갔다. 그때 찍은 박요한 선생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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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선병문 목사님께서 선교부장 장로님과 함께 우리 사역장에 오셨다. 북경에서부터 목사님을 모시고 오면서 북한 선생들에 대해서 신약성경을 100독 가까이 통독했기에 설교도 잘하고 아주 귀하다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믿지 못하셨다. 그저 한 선교사의 의욕에 찬 희망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사역장에 도착한 후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하시면서, 창세기의 요셉에 대해서 설교하셨다. 설교 도중 목사님이 바울 선생에게 물었다.
"요셉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세요?"
북한 형제들이 성경을 100독이나 했다고 하니 성경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것 같다. 바울 선생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담입니다!"
설교를 듣던 북한 선생들의 폭소가 터졌다. 바울 선생을 지그시 바라보시던 목사님이 이번에는 요한 선생에게 눈길을 돌리고 물었다. 요한 선생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힘차게 대답했다.
"아브라함입니다!"
이번에는 모두가 다 배꼽을 쥐고 뒤로 넘어가 버렸다. 나도 한참 웃다가 이들이 당황해서 그런다고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나의 말을 들으시던 목사님은 요한 선생에게 다시 물어 보셨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아요?"
요한 선생이 이번에는 침착하게 대답을 잘 했다. 목사님은 북한 사람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것을 신기해하셨다. 다음 날 두 분은 북경 관광 계획 일정을 취소하고 다시 사역장으로 오셨다. 이번에는 한 사람씩 설교를 시키고 들어 보셨다. 뒤늦게 사역장에 영입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웬만한 목사님들 수준들이었다.
북한 선생들이 공원으로 가자고 생떼를 부리던 날, 요한 선생은 큰 눈을 무섭게 뜨고 협박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선교사님 공원 꼭 가 봐야 합니다! 안 가면 안 됩니다!"
"공원은 아이들이나 가는 곳이에요. 지금 나이들이 얼만데 거긴 왜 간다고 그래요?"
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토요일이라 대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선생들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기어이 오늘은 공원에 가 보자고 떼를 부리는 것이다. 요한 선생이 힘을 주어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평양에 한 번도 못 가 봤슴다! 죽을 때까지도 못 가 볼 검다! 북한에는 평양 딱 한 곳밖에 공원이 없습니다. 우린 맨날 공원을 텔레비전에서밖에 보지 못했슴다! 그런데 공원을 여기 이렇게 가까이 두고 들어가 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됨까!"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졌다. 그래서 들어갔더니 정말 다들 토끼 동산에 들어온 곰들 같았다. 덩치 큰 어른들이 아이들의 놀이기구를 이것저것 만져 보고 타 보고 신나서 깔깔거리면서 돌아다녔다. 그 중에서 요한 선생이 제일 많이 뛰어 다녔다. 이것도 타 보고 저것도 타 보고 욕심이 끝이 없었다. 그리고 탈 때마다 카메라를 든 형제를 불러 꼭 찍게 했다. 고향에 가면 크게 자랑을 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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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열차를 타고 사진을 찍은 박요한 선생. 이때는 정말 다들 아이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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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주 선생과 함께 전동차를 타고 있는 박요한 선생. 옆에서 허익두, 진칼빈, 방무디 선생이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조선족 전관화 선생과 박요한 선생이 공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 뒤에 있는 정자가 희한하고 멋있다고 배경으로 해서 찍었다. 이런 배경에서 찍어야 정말 중국이라는 것을 인정받는다고 했다. 아마 북한에는 이런 건물을 짓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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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나하고도 한 장 사진을 남겼다. 나도 꽤 근사한 배경이 되는 모양이었다. 남조선 사람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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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선생은 칼빈 선생과 함께 한 팀이 되어 연변으로 파송되어 나갔다. 칼빈 선생과 요한 선생은 왕청현 삼도구 아주머니 댁에 은거하며 활동했다. 칼빈 선생과 요한 선생이 행방불명이 된 후 두 사람을 찾으면서 나는 요한 선생 동생 다윗 형제를 만났다. 다윗 형제는 형이 너무 많이 변해서 많이 놀랐다고 했다. 자신도 사역장에 들어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을 가끔씩 해 보지만, 현재는 연길 조직 폭력배에 가담하고 있는 처지라 쉽지 않다고 했다. 형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하자 놀랍게도 이 깡패라고 하는 사람이 쉽게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깡패가 기도한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그래도 기대는 해 보기로 했다.
두 주일 정도 지난 후에야 나는 요한 선생이 칼빈 선생과 함께 북한 보위부에 유인,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주명 형제가 북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오면서, 도문 변방 구류소 벽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칼빈, 요한."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주명 형제는 권능 선생 팀 학생으로 모집되어 연변에서 중국의 남방도시 제남으로 내려오다가 열차에서 체포된 형제이다. 또 회령에서 온 북한 아주머니가 두 선생이 체포되어 나간 얼마 후 두 명의 청년을 기독교 사건으로 공개 총살했다고 전해 주었다. 그 아주머니로부터 처형된 두 청년의 신상을 자세히 물으니 분명히 칼빈 선생과 요한 선생이었다.
파송되기 얼마 전 정주 항공대학교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찍은 사진이다.
제일 앞에 진칼빈 선생이 있고 그 옆에 박요한 선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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